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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Bit, Twice Shy | 찰스 버튼 바버 (Charles Burton Barber) | 1885
여기 또 한 명의 어린 소녀와 강아지가 보입니다. 에드윈 랜시어 경의 '일라이저 필 양의 초상화'와 비교해볼 때 더 작은 어린 소녀와 성견이 아닌 강아지가 함께 있는 그림입니다. 부엌 식탁 밑에서 3~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어린 강아지의 목을 야무지게 겨드랑이 사이로 끼고 어떤 가루를 먹이려고 시도하는 중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어린 강아지는 어린 소녀에게서 빠져나오고 싶어 앞발과 뒷발에 힘을 주고 최대한 버티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표정에서 싫은 기색이 역력합니다. 어린 주인의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들어 저렇게 버티고 있는 걸까요? 소녀가 다른 한 손에 쥐고 있는 무엇인가에 힌트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는데 이 그림의 제목은 찰스 버튼 바버의 '두 번은 안 속아'입니다. 제목에서 이미 상황이 드러나듯이 강아지는 먹기 싫은 어떤 가루를 강제로 먹게 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가루를 소녀는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먹여보았던 모양입니다. 강아지가 알아차리고 빠져나오려고 몸에 힘을 주는 것이 보이니까요. 저 가루가 어떤 가루인지 모르지만 강아지에게 먹여도 될 음식 종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담겨있는 투명 용기로 봐서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갈색설탕이나, 조미료들 중 한 종류 일 것 같습니다. 두 번은 속고 싶지 않은데, 또 잡아서 강제로 먹이려는 걸 보아하니 아이는 장난을 치는 걸까요, 아니면 진짜 강아지가 먹어야 할 음식인 걸까요? 저는 어린 강아지에게 꼭 먹여야 할 가루로 된 영양제 같은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아니면 어린 강아지에게 먹이면 안 되는 음식을 가지고 억지로 먹이려는 것도 귀여운 장난으로 넘기며 가볍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 그림을 어떻게 보면 동물 학대로 보는 말 그대로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 버리는 불상사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전체 이미지로 볼 때 어린아이의 단순한 장난으로 순수하게 보는 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찰스 버튼 바버는 자신의 작품에서 종종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하여 유추해 보게 끔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제목을 강아지의 시선에서 기막히게 잘 지은 것 같습니다.
찰스 버튼 바버 (Charles Burton Barber 1845 ~1894)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후원과 총애를 받은 또 한 명의 영국 동물화가 찰스 버튼 바버는 애드윈 랜시어의 작품을 보고 크게 감동과 영감을 받아 그의 경력을 모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원을 받아 왕가의 애완동물과 왕가 쪽 초상화를 그린 랜시어 경이 사망한 후 그 뒤를 바버가 여왕의 궁정 화가로 선택되어 여왕의 가족과 애완견들을 그리면서 랜시어 경처럼 크게 성공합니다. 하지만 같은 동물을 소재로 했어도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랜시어의 동물들은 인간을 의인화하여 인간의 감정이 동물에 투영되어 보이는 작품들이 많은 반면, 바버의 동물들은 인간의 곁을 지키고 순종하는 충성스러운 친구 같은 동물의 순수한 감정이 드러납니다. 특히 부유층 아이들과 애완견의 모습을 종종 그린 바버는 아이들 곁에 있는 애완견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에서 작은 주인과의 친밀한 유대감과 결속감을 밝은 화풍으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바버의 작품 속 애완견들은 어린 소녀들과 다양한 관점에서 교감을 나누거나 어떤 상황인지 유추해 보게끔 하는 매력이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하고 절로 따뜻한 미소가 풍기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 보자면 랜시어 겨의 작품들 속 동물들은 세밀하고 정교하게 묘사되어 어딘가 무겁고 중후하며 차분한 느낌이 드는 반면 바버의 작품들 속 동물들은 밝고 경쾌한 느낌이 듭니다. 풍기는 전체적인 이미지가 이렇게 서로 다르게 느껴지지만 영국 빅토리아 시대 당대 최고의 동물 화가들이었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원과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금전적 부족함 없이 본인들의 재능을 아낌없이 쏟아부을 수 있었던 두 화가. 바버의 롤모델이었던 랜시어. 두 화가의 재능도 재능이지만 모방하고 배울 수 있는 롤모델이 있고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바버의 시대상황이 부럽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개인의 예술이 이렇게 후원을 받아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 세상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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