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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e biggest! | 아서 존 엘슬리 (Arthur John Elsley) | 1892
침실 한쪽에 어린 소녀가 애완견 옆에 서서 키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두꺼운 책을 발받침으로 삼은 것도 모자라 까치발로 섰는데도 애완견의 키에 모자랍니다. 아마 작년과 비교를 했겠지요. 작년과 비교해서 올해는 부쩍 자랐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애완견이 크지만 비교가 싫지가 않습니다. 양손포즈를 앙증맞게 옆구리에 취한 채 개를 옆으로 보며 흡족하게 웃는 천진난만한 소녀의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순수하게 정화되게 합니다. 개는 어린 주인을 능가하는 체격의 세인트 버나드 종이며 대형견입니다. 앞서 소개한 에드윈 랜시어와 찰스버튼 바버의 작품 속 작은 강아지들과 비교되는 이 그림의 제목은 아서 존 엘슬리의 '내가 가장 커!'입니다. 귀족적이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랜시어와 바버의 소녀들과는 다르게 이 그림의 소녀는 친근하고 서민적인 느낌을 풍기는 소녀와 초대형견의 조합이 잘 어울립니다. 세인트 버나드는 초대형견이지만 큰 덩치와 다르게 온순하고 상냥하여 아이들과 잘 어울리며 장난을 잘 받아준다고 합니다. 아이가 키를 재보자고 귀찮게 옆에 앉히고 자세를 이리저리 손으로 만지며 '이대로 가만히 있어'하고 명령을 했을까요? 아니면 애완견을 다정하게 부르자 조용히 와서 어린 주인 앞에 앉아있을 때 소녀가 책을 들고 애완견옆에 두고 올라가 자연스럽게 키를 재는 시늉을 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후자 쪽인 것 같습니다. 애완견의 표정이나 자세가 불편하거나 어색해 보이지 않고 편안하게 어린 주인의 눈높이에 맞춰주는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해 보입니다. 아마 너그럽고 온화한 세인트 버나드라면 충분히 이해가 될 상황일 겁니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울적할 때 엘슬리의 ' I'se biggest!'를 보면 아이와 동반견의 그림들 중 가장 마음이 순수해지고 따뜻해집니다. 천사 같은 아이의 든든한 보디가드이자 보모 같은 애완견은 어린 주인이 훗날 커서 다시 키재기를 요구해도 한결같은 충성심을 보일 것입니다.
아서 존 엘슬리 (Arthur John Elsley 1860~1952)
영국 빅토리아 시대 후반과 에드워드 시대에 활동한 엘슬리는 아이와 동물그림을 전문으로 그린 화가입니다. 랜시어와 바버 엘슬리 이 3명의 화가의 공통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엘슬리는 바버 사망 후 어린이와 애완동물을 가장 뛰어나게 그리는 화가로 인정받았습니다. 동물과 아이를 주요 소재로 그린 엘슬리의 그림들은 모두 밝고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랜시어와 바버는 빅토리아 여왕의 후원을 받아 왕가와 귀족가문 사람들의 자제와 애완견을 주로 그린 반면, 엘슬리는 서민적이고 목가적인 가정의 아이들과 애완견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림 속의 아이들과 어른들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면 유독 밝게 웃고 있으며 생동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림 속의 아이들과 여성이 주로 본인의 가족을 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밝고 따스한 색채, 미소 짓는 아이들과 그 옆에 같이 있어주는 애완견들의 모습을 보면 본인의 가족과 목가적인 생활을 만족해하며 사랑한 엘슬리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엘슬리는 마부이자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화가의 꿈을 간직하며 자라 14세 때 미술학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0대 때 홍역을 심하게 앓아 시력이 손상되는 불운을 맞게 됩니다. 화가의 꿈을 한창 꽃 피우는 시기에 시력의 손상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술가들에게 고통은 더 큰 예술혼을 불태우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기에 엘슬리는 1878년 18세 때 로열 아카데미 전시회에 첫 작품을 출품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한 달 후 그의 멘토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지만 그의 화가로서의 데뷔전은 보고 눈을 감으셔서 아들이 가는 길에 미련은 남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엘슬리는 그 후 잡지와 책, 달력등의 삽화 작가로 대중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하며 인기와 명성을 얻어가지만 화가로서 치명적인 결함이자 고통인 시력의 손상이 누적되며 괴롭히다 말년에 시력을 거의 잃어 작품에 매진하기 힘든 상황이 됩니다. 그럼에도 붓을 놓지 않고 행복하고 따스한 그림을 꾸준히 남긴 그의 열정과 아름다운 투혼에 지지와 응원을 보냅니다. 그의 이런 열정이 없었으면 오늘날 마음이 정화되고 따스한 그의 많은 작품들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랜시어나 바버의 그림보다 엘슬리의 그림들은 어느 작품 한 점을 딱 꼬집어 좋아할 수 없을 정도로 대부분의 그림들이 너무나 좋습니다. 두 마리의 반려견을 키우고 있는 저도 언젠가 랜시어와 같은 그림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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